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로마 제국/정체성 (문단 편집) ==== 서유럽인들의 인식 ==== 앞서 언급했듯 서유럽인들은 [[신성 로마 제국|스스로의 로마 제국]]을 세우고 나서 동쪽의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흠집내는 데 열심이었다. 동로마 제국이 있던 시절 중서부 유럽에서는 '''그리스 제국'''(Imperium Graecorum), '''그리스 황제'''(Imperator Graecorum) 같은 표현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이 용어들은 동로마 제국이 고대 로마에서 이어진다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서유럽인들 사이에서도 정치적 상황의 변동에 따라 굴곡이 있기는 했어도 동로마는 충분히 로마로 인식되고 있었다. 당장 [[라틴 제국]]의 정식 명칭이 뭐였는지,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가 자칭한 칭호[* 제4차 십자군의 맹주이자 '''로마 제국 3/8'''(...)의 통치자. 무식해 보이지만 다른 지명을 절대로 안넣으려고 실제로 차지한 땅의 이름은 하나도 안붙였다....]가 무엇인지부터 생각해 보아도 그렇다. 오늘날 [[이탈리아]]의 [[에밀리아로마냐|로마냐]](Romagna) 지역도 그 명칭이 이 일대의 도시들 중 하나인 [[라벤나]]에 동로마의 총독부가 소재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서 '로마인들의 땅([[로마니아]](Romania))' 을 뜻한다. 서로마의 실질적인 마지막 수도이자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오도아케르]]에게 폐위당한 도시인 라벤나는, 540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보낸 [[벨리사리우스]]의 군대에게 점령당한 이래 200년간 동로마가 이탈리아 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핵심 거점으로 기능했던 곳이다. 이탈리아 반도 전체가 로마 제국의 고토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라벤나 일대만 '로마냐' 로 불린 건, 서로마 멸망 이후 이민족들 놀이터가 되어 버린 이탈리아 반도에서 이곳만큼은 여전히 (동)로마인이 강한 지배력을 유지했다는 데서 비롯했다. 이와는 반대되는 대표적인 지역이 과거 [[랑고바르드족]]의 왕국이 자리했던 [[롬바르디아]]인데, 명칭의 극명한 대비를 반영하듯 실제로도 롬바르디아 지역의 랑고바르드 왕국과 로마냐 지역의 동로마 라벤나 총독부는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세력 유지 · 확장을 위해 서로 오랫동안 티격태격했다. 그러다가 751년 랑고바르드 왕국이 라벤나를 함락시키면서 동로마는 로마냐 지역의 지배권을 상실하고 말았으나, 이후에도 남이탈리아에 장기간 발을 걸쳐 놓음으로써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영향력만큼은 라벤나 총독부의 몰락을 계기로 상당히 약해졌을지언정 제법 오래 유지하였다.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서유럽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 세운 [[라틴 제국]]의 경우 그 정식 명칭이 '로마니아 제국(Imperium Romaniae)'이었으며, 서유럽 출신인 라틴 황제들은 스스로를 '로마니아의 황제(Imperator Romaniae)' 라고 불렀다. '로마인들의 황제(Imperator Romanorum)' 라는 칭호는 이미 신성로마 제국 황제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라틴 제국의 황제가 이를 그대로 가져다 쓰기에는 신성로마제국 및 이에 정통성을 부여한 교황과의 정치적인 분쟁에 휩쓸릴 위험이 컸고, 그렇다고 아무런 칭호도 안 붙이기에는 '로마 제국 수도의 새 주인' 이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았기에 나름대로 자기네들의 권위도 살리고 교황과의 충돌도 최대한 피하는 심산으로 택한 것이 '로마인들의 땅의 황제(Imperator Romaniae, 로마 땅의 황제)'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틴 제국 황제의 타이틀이 적힌 각종 문서나 인장을 보면 '로마인들의 땅의 황제' 도 아닌 '로마인들의 황제' 라는 칭호를 대놓고 쓴 사례도 적잖이 발견된다. 'Balduinus Dei gratia fidelissimus in Christo imperator a Deo coronatus '''Romanorum''' moderator et semper augustus' 라든지... 'Henricus Dei gratia imperator et moderator '''Romanorum'''' 이라든지... 그리고 '로마인들의 땅의 황제' 도 어쨌든 '로마' 라는 단어가 들어간 칭호이다 보니 분쟁의 소지가 아예 없었던 게 아닌지라, 대용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Imperatore Constantinopolitane, Imperator Constantinopolitanus)' 라는 칭호도 사용되곤 했다.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서방 제국의 존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로마' 라는 단어에 끈질기게 집착한 라틴 제국 황제들의 이러한 행위는, 당대의 서방인들이 동로마의 정체성에 대해 상당히 애매모호한 태도를(어떤 때는 그리스로 봤다가, 또 어떤 때는 로마로 봤다가) 가졌음을 보여 준다. Filip Van Tricht, 『The Latin Renovatio of Byzantium』 p.66,69.] 그리고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을 진두지휘한 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자기 자신과 후대 도제들에게 '로마 제국 3/8의 통치자(DOMINUS QUARTAE PARTIS ET DIMIDIAE TOTIUS IMPERII ROMANIAE, Signor della quarta parte e mezza di tutto l’Imperio di Romània)'[* 원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로마니아 제국의 1/4와 그 절반(a quarter and a half quarter)' 인데, 여기서 '로마니아 제국' 은 라틴 제국이 아닌 동로마 제국을 가리킨다. '로마 제국 영토의 분할' 조약에 따라 동로마 영토의 3/8은 베네치아가, 2/8는 라틴 제국이, 3/8은 기타 십자군 지도자들이 가지기로 했기 때문... 만약 여기서의 '로마니아 제국' 을 라틴 제국으로 해석해 버린다면, 라틴 제국은 '라틴 제국의 황제' 와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가 각각 2/8와 3/8씩 공동 통치하는 국가가 되어 버린다. 참고로 이 조약에 의거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역시 3/8이 베네치아에 할양되었는데, 이때 베네치아가 먹은 구역에 하기아 소피아가 포함되어 있었다.]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여기서 '로마니아' 는 '''로마인들의 땅(Land of the Romans, 로마 땅)'''이라는 뜻으로, '로마니아' 역시 이미 오래 전부터 동로마인들이 자기네 나라를 부르던 속칭으로 널리 사용해온 국명이었다.[* 국명으로서 '~의 땅' 을 쓴 사례는 예나 지금이나 흔히 발견된다는 점에서 동로마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로마니아' 로도 불렀다는 사실은 그다지 특별한 게 못 된다. '루스족의 땅' 을 뜻하는 러시아도 있고, '노르만족의 땅' 을 뜻하는 노르망디도 있으니... 어차피 제국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부른 명칭으로 쓰인 '로마 제국', '로마인들의 제국', '로마인들의 땅의 제국' 모두 자신들이 로마고 로마인이라는 인식을 드러내는 국명이라는 사실만큼은 그 궤를 같이한다.] 라틴 제국의 정식 명칭인 '로마인들의 땅의 제국' 에서의 '로마인' 이 '비잔티움인' 이 아닌 당시 십자군을 주도했던 베네치아인과 프랑스인을 비롯한 '서방인' 을 일컫는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당대의 베네치아인과 프랑스인 모두 자신들을 각각 '베네치아인(라틴어: Veneticis)' 과 '프랑스인(라틴어: Francorum)' 이라고 칭했지 '로마인' 이라고는 안 불렀기에 여기서의 '로마인' 은 명백히 '비잔티움인' 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로마니아 제국' 이라는 국명은 라틴 제국이 아주 새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 과거 동로마인들이 스스로를 즐겨 일컬었던 국명을 서방인들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며, 이는 라틴 제국이 스스로를 (동)로마 제국을 이어받은 나라임을 대놓고 드러내는 퍼포먼스적인 성격이 짙었다. 마치 '라틴 제국' 이라는 아주 새로운 나라가 건국된 게 아닌 단지 '동로마 제국의 라틴 왕조' 가 들어선 것뿐이라는 생각도 가능할 정도로, 최소한 '국명' 만 놓고 봤을 때에는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 이전이나 이후나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기존에 견지하고 있던 '비잔티움은 그리스일 뿐' 이라는 멸시적인 태도를 강하게 관철시켰으면 이곳의 이름을 아예 '그레치아(Graecia, Land of the Greeks, 그리스인들의 땅)' 로 충분히 뒤집어 엎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 고대 로마 시대에 탄생한 단어로서 동로마 땅과 연관성이 강한 '그레치아' 로 이곳의 지명을 바꾸는 것은 서방인들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오히려 그동안 서방인들이 동로마의 정통성을 깎을 목적으로 '그리스' 라는 말을 즐겨 썼음을 감안하면 이곳의 이름을 '로마니아' 에서 '그레치아' 로 갈아치우는 것이 그들 입장에서는 더욱 자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이때의 베네치아인들은 그러지 않았다.] 당대의 서방인들 사이에도 '비잔티움은 로마' 라는 인식이 꽤 널리 퍼져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파일:external/65.media.tumblr.com/tumblr_oh9rc6GQNp1uckof9o1_400.jpg]] 그리고 제국의 영토가 크게 쪼그라든 시기에도 동로마의 황제는 '''로마 황제'''로서 서유럽인들에 의해 경외되었다. 갈수록 커져가는 오스만의 위협에 대응하는 원조를 얻고자 서유럽을 돌아다닌 황제 [[요안니스 8세]]의 사례가 좋은 예다.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형이기도 한 요안니스 8세의 1438년 이탈리아 방문은 현지 예술가들에게 상당한 영감을 불어넣어 그를 소재로 한 다양한 작품들이 제작되었는데,[* 이 외에도 피렌체와 페라라에서는 요안니스 8세의 방문을 계기로 고대 그리스어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져 수많은 이탈리아의 젊은 학자들이 동로마 사절단에게서 그리스어 교육을 받았고, [[플라톤]]과 스트라보 등이 저술한 고대 그리스어로 된 문헌의 수집 및 이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 또한 이 시기에 많이 이루어졌다. 덩달아 신약성경의 그리스어 원문에 대한 관심 역시 높아졌고,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서(기진장)가 위조된 것이었음을 밝히는 데 큰 역할을 한 15세기의 인문학자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의 경우 이 시기에 축적된 그리스어 텍스트 자료를 바탕으로 그리스어 성경과 [[예로니모]]의 라틴어 번역 성경을 비교 연구함으로써 성경에 대한 문헌학적 접근을 꾀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위 사진의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 메달(Medal of John Ⅷ Palaeologus)' 이다. 1438년 요안니스 8세의 피렌체-페라라 공의회 참석을 기념하고자 페라라(Ferrara) 후작 레오넬로 데스테(Leonello d'Este)가 현지 예술가 피사넬로(Pisanello, 피사노)에게 의뢰하여 제작한 이 메달의[* 요안니스 8세 메달은 많은 수가 제작되어 유럽 곳곳에 퍼졌는데, 그 수가 어찌나 많았던지 오늘날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그리스, 미국 등 구미의 여러 박물관들이 이를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 메달을 시작으로 르네상스 시기의 서유럽에서는 당대에 생존한 인물의 얼굴을 넣은 메달 제작이 크게 유행하게 된다.] 표면에는 그리스어로 된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그 문구가 'Ἰωάννης '''Βασιλεύς καί Αὑτοκρἀτωρ Ῥωμαἰων''' ό Παλαιολόγός', 즉 '요안니스, '''[[로마인]]들의 [[바실레프스|황제]]이자 [[아우토크라토르|전제자]]''', 팔레올로고스(John, '''King and Emperor of the Romans''', the Palaeologus)' 이다.[* 반대면에는 말을 타고 있는 요안니스 8세의 모습과 함께 '화가 피사노의 작품' 이라는 글귀가 그리스어(Ἕργον του Πισἀνου Ζωγρἀφου)와 라틴어(OPVS • PISANI • PICTORIS)로 새겨져 있다.] 이것은 동로마인이 아닌 이탈리아인이 만들어서 유럽 대륙 곳곳에 뿌린 것이다.[* 여담으로 이때 피사넬로는 동로마 황제 및 그 수행원들의 차림새에 대단히 감명을 받아서 관련 내용을 상세히 묘사한 기록과 스케치를 다수 남겼고, 이후 제작된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물론 다른 이탈리아 예술가들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했는데, 특히 베노초 고촐리(Benozzo Gozzoli)의 경우 [[동방박사]]의 경배를 소재로 한 그림에서 발타사르(Balthasar)의 얼굴을 아예 요안니스 8세의 그것으로 묘사해 놓기까지 했다. 심지어 [[성 베드로 대성당]]의 5개 출입문 중 하나이자 가운데 문인 필라레테 문에도 요안니스 8세가 이탈리아로 오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 등 당시 동로마 황제의 방문은 서구 예술가 및 인문학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화젯거리로 주목받은 사건이었다.] 자기네들 나름의 로마(=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떡 하니 옹립해 두고 있었던 서유럽조차 동로마 황제를 '로마 황제' 라고 지칭했다. 국력이 사실상 도시 국가 수준으로 전락해버린 시기에도 로마 황제의 권위만큼은 서방과 동방, 가톨릭교회와 정교회를 막론하고 여전히 높았던 것이다. 서유럽 사람들조차 800년 [[카롤루스 대제]]의 서로마 황제 즉위 이전은 물론 그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으로 인식하기도 했음을 보여주는 사료들이 버젓이 존재한다. 일례로 세비야의 대주교 이시도르(Isidore of Seville)는 헤라클리우스 통치기에 발칸 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든 슬라브인들의 침공을 'Sclavi Graeciam Romanis tulerunt', 즉 '슬라브인들이 로마에게서 그리스를 빼앗았다' 고 기록했다. 당연히 800년 이전, 즉 교황이 동로마 황제 밑에서 찌그러져 있던 시기에는 서방인들 사이에도 '동로마 = 로마' 라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800년 교황의 서로마 황제 옹립 이후 변하게 된 것에 불과하다. 참고로 [[십자군 원정]] 초기의 무슬림들은 십자군을 '로마인(al-Rum)' 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이는 동로마와 십자군 모두 기독교 세력인 데서 비롯된 혼동의 결과물이었다. (물론 [[레콘키스타|이베리아 반도에서도 대차게 맞붙긴 했지만]]) 이슬람 세력의 중심부와 가까운 곳에서 오랫동안 치열하게 싸워 온 주요 기독교 세력은 동로마였기에, 가슴팍에 십자가가 그려진 옷 입고 갑툭튀한 서유럽인들을 보고는 '저 놈들도 기독교도인 걸 보면 로마인이군' 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동로마와 십자군은 서로 별개의 세력임을 알아차린 이슬람 세력은 십자군을 일컫는 별도의 명칭으로서 '프랑크인(al-Ifranj)' 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Angeliki E. Laiou, 『The Crusades from the Perspective of Byzantium and the Muslim World』p.56. [[http://www.ellopos.net/elpenor/islam-byzantium.asp?pg=3|#]]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